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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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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척으로 500척의 왜구를 무찌른 진포대첩 鎭浦海戰

1380년 8월 왜구는 5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도 진포(현 충청남도 서천군)를 거점으로 삼아 내륙에 침입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기를 시험해 볼 만한 기회라며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해 참전토록 했다. 원수 나세(羅世)를 필두로 심덕부(沈德符)와 최무선(崔茂宣)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수군은 왜선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 되는 군선 100여 척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왜군은 군선과 군선을 연결하여 거대한 해상기지를 형성하여 위협적인 전세를 펼쳤고, 고려수군은 이 시기 이전에는 왜선의 위세에 눌려 감히 근접할 엄두도 못 냈겠지만 화포로 무장한 덕에 초대형 선단을 향해 대규모 화포공격을 가해 곧 적선 500척을 모두 불살랐다. 왜군은 내륙으로 퇴각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지리산 일대에서 섬멸되었다.
진포대첩은 고려군이 자체 제작한 화기로 거둔 승리였고, 군선에 화포를 정착하여 최초로 함포공격이 감행된 해상전투였으며, 한 차원 높은 함포전술이 가미되어 고려가 해상방어를 적극화하는 새로운 변화를 이뤄냈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관음포대첩 觀音浦大捷

고려 말인 1383년(우왕 9) 5월 정지(鄭地)의 함대가 남해현(南海郡) 관음포 앞바다에 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남해대첩’이라고도 한다.
3년전인 1380년 진포에서 왜선 500척이 격침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왜구는 120척의 군선을 이끌고 침입해 앞서 합포(현 마산)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받은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는 나주의 목포에서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항진(航進)하였고 왜구는 정예병 군사 140명씩을 배치한 큰 군선 20척을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정지는 앞서서 공격하는 배를 격침시킨 다음 화포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17척을 대파하였다.
당시 고려군의 화포를 운영하는 책임자는 최무선 이었는데, 움직이고 있는 적선에 화포를 정확하게 적중시킨 진정한 해전이었다. 이 싸움은 승리를 거둔 뒤에 정지가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통쾌한 적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왜선을 철저히 격파한 해전이었다. 관음포대첩은 왜구들이 고려 수군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고 세계 해전사에서 함포(艦砲)로 적을 물리친 전투라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화상대첩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킨 승전이었으며, 관음포대첩으로 자신감을 가진고려군은 대마도정벌을 추진하였다.

최무선의 화포가 실린 기록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

왜적의 배 5백척이 진포(鎭浦)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으로 올라 각 주(州)·군(郡) ·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 땅에 쏟아진 쌀이 한자 부피나 되었다.
나세(羅世) ·심덕부·최무선 등이 진포에 이르러, 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火砲)를 써서 그 배를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왜적이 거의 다 타 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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