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Experience
첫째,
전투 중 일시적으로 영천이 상실되자 육군본부와 미 8군 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한 것은 영천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둘째,
아군은 데이비드선으로의 철수가 검토됐다. 미 8군은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당시, 울산 북쪽에서 경상남북도 경계선을 거쳐 함안을 연결하는 정면이 90㎞에 달하는 선상에 예비 진지를 구축해 우발사태에 대비했다.
이 방어진지 축성 공사는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드슨(Davidson) 준장 지휘 하에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완공한 것이었다.
셋째,
미 합참은 인천상륙작전 재검토 의사를 거듭 타진했다.
기계, 안강에 이어 영천까지 실함되자 미 합참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맥아더 장군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취소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보완하는 것으로 재검토할 것을 권유하는 의사를 타진했다.
넷째,
영천이 돌파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한국을 한때 포기하겠다고 검토했다.
당시 미 합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를 포함해 62만 명을 미국령 사모아도에 재배치해 신한국을 창설하겠다는 계획(New Korean Plan)을 승인했다.
이 계획은 한국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사전에 거론하지 않았다.
9월 7일 영천 방어가 가망이 없어졌을 때,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이 철수계획을 알려 줬다.